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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1년살기

P의 아일라섬 여행기 2편: 위스키 증류소 투어 후기 (아드벡, 라가불린, 쿨일라)

by OPADmaybe 2025. 9. 13.

지난 '여정편'에 이어, 드디어 아일라섬에 온 진짜 이유! 피트 위스키 증류소 투어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본다. 하지만 그전에, 이 여행의 주인공인 '피트 위스키'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여행 시작 전 TMI: 그래서 피트 위스키가 뭔데?

"아니, 위스키에서 왜 소독약 냄새가 나?" 피트 위스키를 처음 접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이다. (나 역시 그랬다.) 이 독특한 향의 정체는 바로 '피트(Peat)'아일라섬의 척박한 환경 때문이다.

 

옛날 스코틀랜드, 특히 아일라섬은 지금처럼 나무가 거의 없는 황량한 땅이었다. 땔감으로 쓸 나무가 없으니, 사람들은 땅을 파면 지천에 널린 '피트'를 땔감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집 난방도 이걸로 하고, 당연히 위스키의 원료인 보리(맥아)를 말릴 때도 이 피트를 석탄처럼 태워서 그 연기를 쐬어준 것이다.

 

피트는 쉽게 말해 '이탄(泥炭)'이라고 불리는, 식물이 땅속에서 수천 년 동안 덜 썩은 상태로 쌓인 흙 같은 연료다. 이걸 태울 때 나오는 '페놀' 성분이 연기와 함께 보리에 코팅되면서, 그 유명한 '소독약 냄새' (정확히는 어릴 적 무릎 까졌을 때 바르던 요오드 - 요즘은 아이오딘이라고 한다면서요...? - 그 냄새와 비슷하다), '바다 냄새', '장작 타는 냄새' 같은 스모키한 향이 입혀지는 것이다.

 

게다가 아일라섬의 피트는 수천 년간 해초와 바닷바람을 머금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유독 요오드와 짭짤한 바다 향이 더해져 다른 곳에서는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풍미를 갖게 된, 아일라섬의 '테루아(Terroir)' 그 자체인 셈이다. ✨

 

아일라섬 증류소 지도: 어떤 녀석들이 살고 있나

이런 독특한 환경 덕분에, 아일라섬에는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증류소가 10곳 정도 옹기종기 모여있다.

  • 아드벡 (Ardbeg): 강력한 피트향과 스모키함의 대명사. '피트 괴물'이라 불릴 만큼 개성이 뚜렷하다.
  • 라가불린 (Lagavulin): 아드벡과 함께 남쪽의 강자로, 풍부하고 깊은 피트향에 달콤함이 섞인 복합적인 맛이 특징.
  • 라프로익 (Laphroaig):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호불호가 강한 소독약(?) 향의 아이콘.
  • 보모어 (Bowmore): 섬 중앙에 위치한 가장 오래된 증류소 중 하나. 피트와 셰리의 균형 잡힌 맛으로 유명하다.
  • 브룩라디 (Bruichladdich): 실험적이고 현대적인 위스키를 만드는 곳. 비현실적인 파란 병의 비(非)피트 위스키 '더 클래식 라디'가 유명하다.
  • 쿨일라 (Caol Ila): 섬에서 가장 큰 생산량을 자랑하며, 깨끗하고 시트러스한 느낌의 피트향이 특징.
  • 부나하벤 (Bunnahabhain): 대부분 피트향이 거의 없는 부드럽고 셰리향이 풍부한 위스키를 생산한다.
  • 킬호만 (Kilchoman): 섬에서 가장 작은 농장 증류소. 보리를 직접 재배해서 위스키를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 아드나호 (Ardnahoe): 2019년에 문을 연 가장 새로운 증류소로, 전통적인 방식으로 위스키를 만든다.

 

본격적인 위스키 투어, 그 시작

섬에 머무는 2박 3일 동안 우리는 총 3곳의 증류소를 방문했다. 아드벡라가불린은 투어를 신청했고, 쿨일라는 샵에 들러 구경만 하고 왔다.

 

원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에 나와서 유명한, 가장 오래된 증류소 보모어도 가보고 싶었는데... P가 즉흥적으로 여행을 계획한 사이, 투어는 이미 몇 달 치 예약이 꽉 차 있었다. 😇 (여러분, 아일라섬 투어는 최소 한두 달 전엔 예약해야 합니다... P는 웁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피트 괴물'이라 불리는 아드벡(Ardbeg) 증류소다.

 

아드벡 증류소 투어: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아드벡 투어는 우리 부부와 유쾌한 영국 아저씨 3인방, 이렇게 단출한 인원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를 이끈 가이드는 굉장히 젊은 여성분이었는데... 문제는 그녀의 스코틀랜드 억양이 정말, 정말 강력했다는 것. 억양도 센데 말까지 빨라서, 투어 시작 5분 만에 나는 영어 리스닝 시험 한복판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

 

그래도 투어를 시작할 때 위스키를 한 잔씩 따라줘서, 그 향을 맡으며 따라다니니 갬성은 아주 좋았다. 🥃 맥주나 와인 양조장은 가본 적 있어도 위스키 증류소는 처음이라, 약간씩 다른 점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특히 위스키를 증류하는 통 모양이 참 신기했는데, 저 위로 뻗은 나팔 같은 곡선의 각이 좁을수록 강렬하고 완만할수록 부드러운 맛이 난다고 했던 것 같다. 신비로운 화학의 세계...

 

 

재미있었던 건,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도 아드벡의 피트 향에는 아주 매력을 느꼈다는 점이다. 이게 무슨 냄새냐며 계속 킁킁거렸다. (제시 핑크맨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나는 시음을 했고, 남편은 운전 때문에 '드라이버'스 드램(Driver's Dram, 스코틀랜드에서 '술 한 잔'을 Dram이라고 한단다)'을 받았다. 아드벡의 드라이버스 드램은 귀여운 원통형 패키지에 담겨있어 아주 좋은 기념품이 되었다.

 

시음 후에는 역시 쇼핑 타임! 아일라섬에 오기 전 가격 조사를 살짝 해보니, 현지 양조장이 면세점보다도 20~30%는 저렴하고, 이곳에서만 살 수 있는 한정판도 있었다(다른 양조장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고민 끝에 아드벡 위스키 한 병을 획득했다!

 

다음 코스는 라가불린: 슬리데린을 닮은 증류소

 

아드벡 투어를 마치고 향한 곳은 바로 이웃사촌 라가불린(Lagavulin). 초록색 패키지에 도마뱀인지 용인지 모를 동물이 그려진 로고가 어쩐지 슬리데린 기숙사를 떠올리게 한다. 🐍 굿즈도 예쁜 게 많아서 샵에서 한참을 구경했다.

 

라가불린 투어는 아드벡보다 훨씬 더 풍성하고 재미있었다! 우리를 이끌어준 가이드는 거의 백발에 가까운 할머니셨는데, 연륜에서 나오는 인자함과 여유가 느껴져서 좋았다. (주조업계는 왠지 남성적일 거라는 편견이 있었는데, 아드벡도 그렇고 여기도 여성 가이드가 있어서 신기했다. 백발 할머니가 따라주는 위스키라니, 너무 멋지잖아!)

 

아드벡보다 좀 더 대중적인 곳이라 그런지 투어 인원도 훨씬 많았고, 심지어 학생들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선 왠지 아이들을 데려가면 안 될 것 같은 양조장인데, 여기서는 마치 화학 공장 현장학습 같은 분위기라 신기했다. 술을 특별히 배척하기보다, 하나의 산업이자 문화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열려있어 보였다고 할까.

 

투어는 아드벡처럼 실제 제조 공정을 따라 진행됐는데, 역사가 더 깊어서인지 볼거리가 많았다. 초창기에 쓰던 도구나 전통 방식 굴뚝, 그리고 1963년에 만들어져 아직도 은퇴하지 못한 '몰트 밀(Malt Mill, 맥아 분쇄기)' 같은 것들 덕분에 이야기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특히 아드벡은 공정을 따라가며 중간중간 시음을 하는 방식이었는데, 라가불린은 투어가 모두 끝난 후 별도의 테이스팅 룸에 모여 시음을 시켜주는 점도 더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고 좋았다. 물론 라가불린에서도 운전자인 남편 몫의 '드라이버'스 드램'과 양조장 한정판 위스키, 그리고 너무 귀여운 컵 코스터까지 야무지게 획득했다! ✨

 

쿨일라: 조니워커의 '씨간장'을 맛보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쿨일라(Caol Ila) 증류소. '콜 일라'인지 '쿨 일라'인지 이름부터가 헷갈리는, 우리나라엔 조금 낯선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바로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조니워커(Johnnie Walker) 위스키의 '씨간장' 같은 역할을 하는 아주 중요한 곳이라고 한다. 쿨일라의 원액을 기본으로 다양한 위스키를 섞어(블렌딩) 조니워커가 탄생한다는 것! 그래서인지 증류소 내부에는 조니워커와 관련된 그림이나 조형물이 많았다.

 

 

쿨일라에서는 투어 대신 바(Bar)에서 위스키 구경을 하고 아이스 라떼를 마셨다(웬 아이스 라떼? 하지만 스코틀랜드에서 아이스 라떼는 굉장히 귀하다! 위스키를 슬슬 많이 마셔서 시원한 음료가 필요하기도 했다 ^_^). 그리고 여기는 투어를 참가하지 않더라도 방문객에게 위스키 샘플러 병을 선물로 주는게 굉장히 고마웠다. 기념품 샵에서는 너무나 귀여운 '스터 스틱(Stir Stick, 젓는 막대)'을 발견! 조니워커 로고 모자가 달린 디자인에 홀려 냉큼 하나 사 왔다. 물론 지금 그 스터 스틱은... 집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다. 역시 하이볼은 젓가락으로 휘휘 젓는 게 제맛이지. 😇

 

증류소 투어를 마치며: 술을 안 좋아해도 괜찮아

아일라섬엔 증류소가 한참 더 많았지만, 슬슬 남편의 눈치가 보여 더 이상의 증류소 방문은 주장할 수 없었다. (평화로운 여행을 위하여...🥂)

그래도 남편 입장에서 좋았다고 한 점은, 꼭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증류소 투어는 그 자체로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증류소들이 대부분 바닷가에 위치해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조금씩 다르고 아름다웠다. 공기 중에 달달하게 날리는 맥아 냄새도 중독성이 있었고. 그리고 '드라이버'스 드램'을 받아온다면 술을 좋아하는 지인에게 선물로 주기에도 정말 좋고, 집에 디피해두기에도 예쁘게들 패키징을 해주니 '예쁜 쓰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

 

 

사실 아일라섬은 위스키 증류소를 빼고 봐도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나무 하나 없이 드넓게 펼쳐진 풀밭, 특유의 흐릿한 북쪽 바다의 감성, 그리고 회색빛 해변은 아주 환상적이다. 멋진 경치를 보며 30분을 걷는 동안 사람을 한 명도 마주치지 않는, 그런 기묘하고 이색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곳. 🌾🌫️

 

위스키 투어 이야기는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다음번에는 위스키 없이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던 진짜 아일라섬 여행기로 돌아오겠다!

 

(To be continued...) ➡️